달력은 1월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옷차림은 단순했다. 편한 반팔 티셔츠에 카디건 하나. 밑창이 닮기 직전의 오래된 슬리퍼. 작게 하품을 하며 나온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몇 유사어들을 의식적으로 밀어냈다.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툭툭 튀어나와 그것들을 발로 쳐냈다. 문장의 마침표 대신 돌멩이가 떽 떼굴 굴러갔다.
상하이, 푸동의 바닷바람은 미적지근했다. 겨울임에도 그랬다. 당연했다. 러시아의 겨울바람에 비하면 이정도 밤바람은 산뜻한 봄바람보다 못했다. 늦은 새벽에도 열려있는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하나 샀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달달한 커피향이 다가왔다. 입 안에 집어넣자 필요 이상으로 단 맛이 느껴져 역으로 인상이 쓰였다. 잠은 확실하게 깼지만 입맛은 버린 기분이 들었다. 어거지로 한 입에 우겨넣고 삼켰다. 빈 캔을 대충 구긴 뒤 쓰레기통에 버렸다. 깡, 소리와 함께 도시에서 바람이 불었다.
산책이 길어지면 구석에 쳐박아 둔 잡다한 생각이 흘러나온다. 생각과 함께 기억 속 퀴퀴한 종이냄새가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듯 했다.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가장 먼저 외운 영어 문장은 창세기였다. 대략적인 알파벳과 파닉스만 알고 있는 자신에게 성경책 한 권을 던져주고는 외우게 시켰으니, 재미를 붙이기는 커녕 와닿지 않는 내용에 그저 힘들기만 했었다. 어거지로 성경을 통채로 외우는데 성공했으나 그게 시작이었다.
좁은 방 안에서 의미없는 옮겨쓰기를 계속했다. 종이와 공책들과 함께 그를 향한 불신도 함께 쌓아올렸다. 안테로라는 이름을 받기 전, 그가 가장 먼저 주에게 바친 제물이었다. 의문, 불신, 지루함, 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들로 덧칠된 또 다른 성경책.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이런 일을 시키는 양아버지에게도 벌을 내려야 했고 그것을 직접 써낸 제게도 벌을 내리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결과는 어떠했나. 신자의 탈을 뒤집어쓴 가짜는 세례를 받았고, 본래의 이름보다 안테로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쓰게 되었다.
어릴 때 느꼈던, 기묘한 해방감 마저 들 정도로 매섭고도 찬 바람.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바람을 맞고 있으면 그 때의 찬 공기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느꼈던 감각은 다시 느끼지 못할 것이다. 답답했던 숨이 탁 트였던 그 때, 나는 살아있구나. 따위의 생각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였던 나날들. 감옥이라 생각했던 것이 자신을 보호하려던 나름의 울타리였음을 이제는 안다.
죄를 저지르며 살아남았기에 후회를 한다. 이는 산 자의 몫이다. 죽은 자의 몫이 아니다.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국 또는 지옥에 갔을 것이고, 자신은 아직 연옥에 있다. 다시 마주보는 일은 먼 미래에 그려질 것이다.
아니다. 조만간이 될 수도 있나? 지금껏 일을 하면서 쌓아온 원한과 업보들을 떠올리고 안테로는 피식 웃었다. 그건 그 때 생각할까. 의식의 흐름을 한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시야에 또 다른 편의점이 보였다. 이번에는 싸구려 커피가 아닌 다른 음료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1) 창세기 1:1, King James Vers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