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쉬어야 하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집 청소를 끝내고 이제 무얼 하며 시간을 죽여야 하나, 하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책장의 가장 아래 숨겨놓듯이 둔 커다란 박스 하나. 평소라면 눈에 들어왔어도 못 본 척 지나갔을 물건이었지만, 지난 임무지에서 신병들과 그들의 선임들이 하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던 벨베르디아는 오랜만에 상자를 열었다. 쌓인 먼지들이 근처를 맴돌다 사라졌다. 먼지의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박스 안에서 생각했던 물건을 꺼냈다.
손 때를 많이 탄 갈색 표지의, 사전보다 더 두꺼운 낡은 공책이 벨베르디아를 반겼다. 별다른 제목도, 꾸밈도 없는 두꺼운 표지를 넘기자 어릴 때의 솔직하게 써내린 속마음들이 보였다. 지금의 벨베르디아 입장에선 낮부끄럽기도 하고, 하찮은 고민들.
일기장을 막 쓰기 시작했던 이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계기. 첫 페이지에 썼던, 9살의 벨베르디아가 쓴 최초의 질문 하나. 이제는 잊어버린, 답을 찾을 필요조차 없어진 질문. 벨베르디아는 더 볼 필요를 느끼지 못해 페이지를 넘겼다.
친구의 사소한 고민부터 걱정했던 기억, 책 읽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고, 동생이 친구와 어떻게 놀다 왔다고 떠들었던 자잘한 이야기. 그걸 들으며 기뻐하는 나와 내가 이래도 되는가? 하는 의문.
페이지를 계속 넘기다보니 아카데미 시절의 기억도 보였다. 맞아. 그 때는 몰래 썼었지. 방을 공유했던 룸메이트들도 이 일기장을 보지 못했다. 일부러 방이 비었을 때, 사람이 없을 때. 또는 다른 종이에 쓰고 끼워 넣는 방식...으로. 누군가는 과하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래야만 했다. 벨베르디아에게 있어 이 공책은 부끄럽고 숨겨야 할 것이었다.
찬란했을 페이지가 느리게 넘어가고, 졸업과 함께 한 단락을 맺었다. 다시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 나왔다. 평소보다 떨리는 글씨체를 보는 것 만으로도 그 때의 기분이 어땠는지 짐작이 갔다.
훈련과 실전은 다르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넘쳐나고, 그 앞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남았다. 아니, 그저 운이 좋았을 지도 모른다.
오늘의 전투에서 사람이 죽었다. 처음이었다. 아침 장비 점검시간에 스치듯 인사를 했던 중사였고 내 선임 중 한 명이었다. 투덜거리던 선임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듯 선명한데, 더는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더 이상한건 그 위의 선임들이었다. 쯧, 소리를 내며 무덤덤한 얼굴로 뒷정리를 하는 모습을 보니 이상한 것은 나인가, 싶었다. 무엇이 정상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런 일을 더 겪다보면 알게 될까.
...아카데미 시절을 함께했던 동기들의 부상 소식이 하나 둘 들려왔다. 빌어먹게도 나는 운이 좋았다. 다친 적은 많아도 내 몸 일부를 쓰지 못할 정도로 다치진 않았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무력했다. 차라리 치유계 능력자였다면,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만큼 잠들지 못하는 밤도 쌓여갔다.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다른 이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란 말이었다. 내게 거부권은 없었다. 통보란 말이 더 정확했을 것이다. 이 일의 파장이 어느 정도일 지는 몰라도 본가에 피해가 가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발 밑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애원은 잘 먹혀들었다. 징계서 및 신문을 통해 넘어간 내 이름 다섯글자 뒤에 화이트다운은 없었다.
A구역으로 이사했다. 원래 입대와 동시에 독립해 본가 근처에 살고 있었지만 이번 결정은 내 독단이었다. 일방적 통보였으니 가족들은 반발했다. 나는 그들을 피했다. 일부러 장기 임무를 받고,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그들에게서 잊혀질 것이다. 어릴 때의 내가 일기장에 질문을 썼다 지웠던 것처럼. 그렇게 엄마라는 자와 소중했던 남동생을 잊었던 것처럼.
이상은 닿지 않는 별처럼 멀리 있었고 고통은 눈 앞에 산재했다.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여 종이에 옮기는 것 조차 힘들었다. 부유하다 못해 넘쳤고, 결국 차고 흘러 나를 질식시켰다. 생각하면 할 수록 나는 괴로웠고, 고통스러웠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몸을 움직였다.
징계기간이 끝나자마자 중위로 승급했다. 그와 동시에 조용히 따라오는 명과 함께 제의를 받았다. 당연하게도, 내게 거부권은 없었다. 머리를 조아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려온 명령은 빌어먹게도, 반동분자로 추정되는 자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면 좋았을텐데. 라는 메모만 남아있다.
크리처로부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입대했는데 이제는 사람을 헤치는 도구가 되었다. 그래, 도구. 그것만큼 적합한 말이 또 있을까.
쌓여가는 명령. 늘어나는 전우의 시체. 이것을 전우라 부를 수 있을까. 그들 입장에선 내가 배신자가 아닐까?... 아니다. 나는 배신자가 아니다. 군인이란 틀 안에 들어오려면 이정도는 각오해야 했던 것이 아닌가. 확신이 서지 않는 생각들이 섞이지 못하고 제멋대로 떠다녔다.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수행해온 명령의 수를 세지 못하게 되었을 즈음.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을 별 생각도 감정도 없이 수행하는 자신을 보았다. 그제서야 알았다. 행동에 이유를 찾으려 하지 말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을.
무기의 방향은 쥐고 있는 사람의 뜻에 따라 정해진다. 트라이던트는 하나의 무기이고, 그것을 사용하는 자는 위에 있다. 무기 그 자체는 뜻을 가지지 않는다. 무기는 사고하지 않는다. 설렁 그 방향이 등을 맞대었던 자에게 향해지더라도 행해야 했다. 왜냐하면, 무기는 제 옆에 놓인 또 다른 무기의 이름 따위 알 필요가 없으므로. 기억하지도 않고, 그것이 사라지거나 부서져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도구는 도구로써 쓰여져야 한다. ...아버지가 그 이야기를 할 때는 이런 의도로 쓴 것이 아닌 듯 했지만, 문장의 명제에 대해 논하자면 그것은 참이었다.
일기장은 여기서 끝나있었다. 어린 날 자신의 고민이 가련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시절이 있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멀게만 느껴졌다.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는데도. 불쌍하네. 벨베르디아는 과거의 자신을 동정했다. 그럼에도 이 치부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이에 섞인 찬연한 기억들을 놓을 수 없었기에. 벨베르디아는 일기장을 덮어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다시 열게 될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던 벨베르디아였지만 누구에게라도 빌고 싶었다. 원한다면 무엇이든 할 것이고 앞으로도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행할테니, ‘벨베르디아’라는 무기가 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망가트리지 않기를.
러닝 타임으로부터 약 1달 전 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