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용이 자신을 내려준 곳은 인적이 없는 계곡이었다. 이곳은 물소리를 제외하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살아있는 것은 자신을 빼고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을 모두 지운 듯한.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완벽한 장소였다. 기지개를 쭉 펴고 코트를 벗었다.
나풀거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며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머리카락에 가려졌으니 망정이지 자칫 잘못 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의 존재를 들켰을 것이다. 목까지 올라온 이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하고 속삭이는 듯 했다. 피부 위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 들어 새로 생긴 반점 위를 북북 긁어내리며 옷을 벗었다.
맑고 깨끗한 물에 비친 자신의 몸을 쳐다보았다. 물가에 보이는 그의 몸은 목 아래의 대부분이 검푸른 색으로 변해있었다. 성장할 줄은 몰랐는데. 목을 긁으며 엔비는 자신의 몸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이것을 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자신의 몸은 먹기 위한 도구였으므로. 자신이 쓰는 수저가 더러우면 닦으면 그만이다. 닦여지지 않는 얼룩은 내버려두면 되고. 몸에 있는 너네도 배가 많이 고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더 참아봐. 얼마 안 남았어.
다시 한 번 기지개를 펴고 물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정적을 깨려는 침입자를 거부하는 듯 자신의 차가움을 과시하였으나 그에겐 그런 저항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엔비는 물살을 헤치며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누웠다. 물이 자신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편안했다. 간지러움도,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도 널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 또한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아.
가족과 고국에게 조금도 쓸모가 없는 찌꺼기.
멍청하긴, 내가 먼저 그들을 버렸어.
갑작스레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모도 포기한 자신을 성년이 되기 전까지 잔소리를 했던 그의 형은 소서러였다. 지금쯤 부모님의 유산을 이어 받아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고 있겠지. 편지라도 써달라며 자신의 손을 꼭 붙잡던 형의 모습이 머리에 남아 한달에 한번씩 편지를 쓰곤 했다. 답장을 받진 않았지만, 가끔 조합에 가면 아체르나르에서만 자라는 꽃을 말려서 보내주곤 했다.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낸 것이 언제였지. 슬슬 보낼 때가 된 것 같은데. 자고 일어나 조합에 들려 편지를 보내고 오랜만에 아체르나르에 들릴까. 시선 너머로 보이는 빛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숨이 차는 듯 했다. 이제 일어나야지.
물 위로 올라왔다. 머리를 털며 물가 옆에 개어놓은 코트로 몸의 물기를 대강 닦았다.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를 손으로 넘기고는 옷을 입었다. 개운하게 씻었으니 이제 부족한 잠을 채울 차례였다.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이니 하루 정도 잠을 자도 방해 받진 않을 것 같았다.
옷을 다 입고 허리춤에 단검을 차다가 새로 얻은 단검을 꺼냈다. 다른 단검들과는 달리 칼날이 까맣고 희뿌연 연기가 감도는 듯 했다. 보고 있자니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잘 부탁한다. 칼날에 입을 맞추고 품 안에서 용에게서 얻은 피를 꺼냈다. 한모금도 채 되지 않는 그것은 평생 아껴 마실 생각이었으나, 이곳에 오기 전 아무리 먹어도 끝나지 않는 고기와 피를 마셨기 때문에 더이상 아껴 마실 이유가 없었다. 가치는 떨어졌으나 잠들기 전에 마실 음료로는 최고가 아닐까. 병뚜껑을 열어 안의 내용물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달콤한 향이 입 안을 감돌았다. 오랜만에 즐거운 꿈을 꿀 것 같았다. 빈 병을 코트 주머니에 넣어놓고는 옷을 개어놓았던 곳에 벌러덩 누웠다. 코트를 이불처럼 덮고 단검을 품에 간직한 채 그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잠든 그의 얼굴 위로 푸르스름한 얼룩이 자라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