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20200428 - ㅂㄹㅍㄹ
2021-02-24 17:09

 Karma

 

 

200X년 5월 7일.

 

 물기 섞인 구름이 해를 가려 꽤 쌀쌀했다. 화사하게 핀 장미 덤불에 물기가 제법 남아있고, 길 한 구석에 보이는 얕은 물웅덩이를 보아하니 새벽에 비가 내렸던 듯 했다. 얇은 회색 코트를 입고 청은색의 긴 머리를 가볍게 머리를 묶어 올린 베른은 그의 형, 체이스와 그의 연인인 아리안느가 부탁한 케이크를 사기 위해 베이커리로 향했다

 두 사람이 부탁한 딸기 샤를로트 케이크를 사고, 마카다미아와 디아망 쿠키를 담았다. 자신이 먹을 샌드위치도 담자 봉투가 꽤 묵직 해졌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베른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런 베른의 등을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의 눈에 웃고 있는 물색 눈의 여인이 있었다. 몇 년 간 긴 바다색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기 어려울 정도로 바빴던 에일라였다. 훌쩍 떠났을 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에 따라 웃었다. 넌 한결같네. 당장 돌아갈 필요가 없었기에 그는 오랜만에 만난 이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었다. 두 사람은 야외 카페테리아에 앉아 진한 커피와 함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커피를 다 마신 뒤 그녀를 위해 기꺼이 포터가 되었던 베른은 선물이라며 에일라가 준 머리 장식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채 돌아왔다.

 

 

 뭔가 이상한데. 베른은 불 꺼진 집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평소라면 지금쯤 집 안에 불을 켜고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어두컴컴한 창문 너머로 어떤 소리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둘 다 피곤해서 불을 다 끄고 잠을 자고 있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지만 기우이겠거니 하며 감을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확 느껴지는 비릿한 쇠의 냄새. 살면서 단 한번도 맡아본 적 없는 것이었지만 머리속에서 떠오르려는 냄새의 정체를 애써 무시했다. 들고 있던 쿠키와 샌드위치가 들어있는 종이봉투와 케이크 상자를 조심스레 내려 두고 신발장 근처에 있는 구둣주걱을 손에 쥐었다. 이 상황이 장난이길 바라며, 베른은 발걸음 소리를 죽인 채 천천히 현관에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철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베른의 눈이 아래로 향했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빛이 베른의 발 밑을 밝히기에 충분했기에 그는 자신이 무엇을 밟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무바닥을 물들인 선연한 붉은 색. 애써 모른 척 하려던 것이 무색하게 한 번 눈에 들어온 것을 쉽사리 시야 밖으로 옮길 수 없었다. 손에 쥐고 있는 구둣주걱에 힘이 들어갔다. 그 때 베른의 귀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철퍽. 자신이 처음 낸 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소리였다. 마치 무언가를 밟은 듯한…

 베른은 소리가 들린 곳을 가늠했다. 서재 쪽인가. 평소 체이스가 업무를 보던 곳이었다. 아리안느도 그곳에 같이 있었을 터. 어쩌면 두 사람이 살아있을 수도 있다. 바닥에 흩어진 피의 주인이 두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진 채 베른은 발을 움직였다.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것은 방 주인들이 아니었다. 박물관에서 봤을 법한 백색의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쓴 채 백색의 가면을 쓴 여러 사람들과 유일하게 가면과 후드를 쓰지 않은 남자가 있었다. 그들의 발 밑에는 잘게 다진 고깃덩이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책상 근처에는 갈색 털 뭉텅이와 자신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의 청회색의 털 뭉텅이 같은 것이 보이기도 했다.

 서재의 문이 열렸다. 자신이 민 것도 아닌데 갑작스레 열린 문에 놀란 베른은 손에 쥔 것이 자신의 생명줄인 것 마냥 다시 힘을 주었다. 동시에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이 문을 연 것이 아니고, 열린 방 안 사이로 이 문을 잡아당겨 연 사람이 없는데. 누가 문을 연 거지?

 베른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하는 동시에 방 안의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상대는 다수였고 자신은 혼자였다. 무턱대고 달려들면 순식간에 제압당할 것이 훤했다. 가면을 쓰지 않은 자가 리더인가? 가면을 쓴 사람들은 자신을 보고 있지만 단 한 명. 가면을 쓰지 않은 인형 같은 남자는 바닥을, 정확하게는 발 밑의 고깃덩어리들을 보고 있었다.

 잘 빚어낸 인형. 만약 지금의 상황이 아니었다면 저런 사람의 얼굴에 표정이 생긴다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을지도 몰랐다. 베른은 한 걸음 앞으로 옮겼다. 그 순간 연보라색 눈과 연두색 눈이 마주쳤다. 텅 빈 눈동자. 어떤 것도 담겨져 있던 탓에 베른은 허탈하게 웃었다. 내 세계는 지금 박살 났는데, 그걸 박살낸 상대에겐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 보였다.

 연보라색 눈에 담긴 감정들을 읽어낸 상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작게 턱을 까딱이자 남자 주변에 있던 백색 로브의 사람들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사라졌다. 내가 방금 뭘 본 거지. 사람이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네. 마술인가? 유령?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일반인인 베른의 머리로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클린]

 

 가면을 쓴 사내가 입을 열자 피로 흥건했던 바닥,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고깃덩이 등 어지러웠던 서재가 말끔해졌다. 좀 전엔 사람이 사라지더니 이번엔 청소가 되네. 이야, 이대로 청소 업체 하나 열면 아주 핫 하겠어. 베른은 비어 있는 손으로 잠시 제 얼굴을 가렸다. 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어이가 없네. 손에 닿는 자신의 피부가 뜨거웠다. 비현실적인 상황에 닥친 나머지 나도 미쳐버린건가? 연두색 눈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야!”

“놓지.”

 

 상대는 자신이 멱살을 잡혔음에도 남자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예상을 했던 것 같기도 했고,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베른이 손에 힘을 주며 상대를 흔들자 제 손을 따라 흔들리는 것이 영락없는 인형이었다. 얕게 느껴지는 호흡과 자신을 올려다보며 느리게 깜빡이는 눈이 아니었다면 손 안에 있는 상대 또한 환상의 일부라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진 것을 제외하고 달라진 것 없는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베른의 몸이 무언가 강력한 힘에 밀쳐진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베른의 머리 위로 몇 권의 책들이 쏟아졌다. 다른 한 손에 쥐고 있던 구둣주걱은 제 손에서 벗어나 저 멀리 방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시야를 가리는 책을 치우니 구겨진 옷주름을 제외하고 조금 전과 다를 것 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내려보는 상대가 있었다. 내리 감긴 연두색 눈은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지.”

“모시겠습니다.”

 

 두 개의 백색의 로브가 베른이 있는 곳을 지나쳐 서재 밖으로 나가려 했다. 베른의 손이 로브 끝자락을 쥐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이 집에서 바로 떠났을 것이다. 로브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남자의 고개가 돌아가 자신의 로브를 쥐고 있는 베른을 향했다. 텅 빈 연두색 눈동자와 잔뜩 일렁이는 연보라색 눈동자가 다시 마주쳤다.

 

“너, 뭐하는 새끼야.”

“...헤르츠 경.”

 

[슬립]

 

 누군가 강제로 의식을 어딘가로 던져두는 것 같았다. 잠들면 안되는데. 감겨지려는 눈에 힘을 준 베른의 눈에 제게 무어라 말하는 듯한 남자의 입이 보였다. 베른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플.란.츠. 베른이 똑같이 따라하자 남자의 입가가 작게 올라갔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어서 다음 뉴스입니다. 6월 13일 저녁, 세크리티아㈜의 회장 데블란 세크리티아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사망 원인을 심근경색으로 인한...]

 

 주변에 어지러이 쌓여 있는 책들과 서류, 그 중심에서 베른의 손이 바쁘게 움직이다 멈췄다. 어찌보면 흔한 뉴스 보도 중 하나였으나 베른이 흘려 들을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 들어있었다.

 

[또한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체이스 세크리티아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지 약 한 달이 되어가고 있어 회사 내 혼란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현재 최고 경영인 중 한 명인 루이즈 넬라가 데블란 세크리티아를 대신하여…]

 

 다음 뉴스로 넘어가 또 다른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지만 베른은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는 데블란 세크리티아라는 사람이 심근경색 따위로 죽을 사람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베른은 약 한 달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석이다. 어떤 증거도 없었지만 베른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열기가 몸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201X년 4월 29일.

 

 해가 머리 위에 올라와 있을 무렵이었지만 백색의 저택 안은 한밤 중인 것 마냥 어두컴컴했다. 필요에 의해 – 보통 청소 및 환기를 위해 – 걷어둔 곳을 제외하면 집 전체의 창문에는 암막 커튼으로 가려두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램프와 비슷하게 생긴 손전등을 하나씩 든 채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주방과 같은 예외적인 장소를 제외한 곳에서 필요 외의 빛을 쓰지 말라고 명했던 주인의 명에 충실했다. 귀찮거나 번거로운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주인은 특별한 상황과 이러한 주의사항들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필요 외의 지시를 하지 않았다. 비서이자 시종장인 레릭을 제외하면 주인을 직접 마주할 일도 거의 없어 이 집의 고용인들은 이런 평화로움을 만끽하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고용인들의 평화를 깬 것은 검정 코트를 입고 작은 배낭을 맨 청은발의 사내였다. 모자조차 눌러쓰지 않은 상대는 당당하게 요구했다.

 

“주인장에게 전하게. 베른 세크리티아가 왔다고.”

“주인어른께서는 선약 없이 만날 수 없습니다.”

“약속이라면 7년 전에 했네만.”

 

 오늘 찾아간다고 하진 않았지만. 베른은 뒷말은 삼킨 채 고용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고용인들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경찰을 불렀겠지만 상대는 몇 년 전 뉴스의 한 면을 가득 채웠던 ‘베른 세크리티아’ 였다.

 

 베른 세크리티아. 약 7년 전 세크리티아 일가가 모두 실종 및 사망하여 후계 논란으로 어지러웠던 상황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이 후계자라 주장했다. 이전까지 회사 및 공식 석상에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으나 청은발의 머리카락과 데블란을 닮은 특유의 것이 그 역시 세크리티아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또한 임시로 회사를 이끌고 있던 최고 경영인 루이즈 넬라가 공식 석상에서 그가 데블란의 자식이 맞음을 인정하자 출신에 대한 말은 더 나오지 않았다.

 회사 내부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무엇을 해결하겠느냐. 라는 말 역시 오래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는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게 당장 당면한 문제부터 해결해갔다. 급한 불을 끈 다음 별다른 성과를 내지 않았던 프로젝트에 손을 대더니 세크리티아㈜의 또 다른 간판 산업으로 바꿔냈다. 이전, 데블란의 경영 방식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으나 베른에 의해 진행되는 조직 개편 및 프로젝트들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몇 년. 회사가 안정궤도에 접어들자 돌연 베른은 이후 자신이 더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경영에 관한 모든 것들을 전문 CEO에게 넘긴 뒤 모습을 감췄다. 혹자는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 뒤에서 지시를 내리고 있다고 했으나 어떤 소문과 일이 생겨도 베른은 세크리티아의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저택 앞에 서 있으니, 고용인들이 당황해 하는 것은 당연했다. 가볍게 산책을 나온 것 마냥 편안한 옷차림과 당당한 태도. 이런 자를 계속 저택 문 앞에 세워 둘 수는 없어 그들의 상관인 레릭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후사정을 들은 레릭은 자신의 주인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 이동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와,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이렇게 어두컴컴해. 누가 보면 흡혈귀가 사는 줄 알겠군.”

 

 현관을 통과한 베른이 빠르게 자신의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훑었다. 그 때 만났던 백색 로브들과 달랐다. 평범한 사용인들인가. 베른이 집 안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실내에 불이 들어왔다.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다 암막 커튼으로 가려둔 주제 가구는 대부분이 백색이었다. 이런 곳에서 살면 멀쩡한 사람도 병에 걸릴 것 같은데. 속으로 혀를 찬 베른은 안내 받은 자리에 앉았다.

 기다림의 시간은 짧았다. 베른이 앉은 의자의 반대편 복도에서 레릭이 걸어와 베른의 눈 앞에 섰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모시겠습니다.”

 

 거봐. 사용인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지은 베른은 불편한 표정으로 자신을 안내하는 레릭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도착하여 레릭이 문을 열어주고 베른이 들어간 방에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촛불이었다. 와, 밖에선 전기등불을 쓰더니 여긴 진짜 촛불을 쓰네. 신기한 눈으로 보던 베른의 시선이 옆으로 옮겨졌다.

 가벼운 옷차림에 연노란색 카디건을 하나 걸친 채, 잠에서 깬지 얼마 안된 듯 반쯤 감긴 눈의 남자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눈 앞에 선 베른이 아닌 바닥을 향해 있었다. 상대의 태도에도 베른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안녕, 7년만에 보는데 당신은 변한 게 전혀 없네.”

“...”

 

 베른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 있는 물건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 손에 쥔 것을 여전히 바닥을 향해 있는 남자의 미간에 가져갔다. 철컥, 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남자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7년만에 다시 마주한 상대는 어제 만났다 헤어지고 오늘 다시 만난 것처럼 변한 것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닐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600년 전에 사라진 브리센의 망령일 줄은 몰랐지.”

 

 1463년, 실리케 브리센이 혁명군과의 협상을 거부한 채 성문을 닫았다. 이 시점에서 브리센의 패배는 확정된 것이었다. …(중략)… 결국 1464년 8월 23일 오전, 실리케 브리센은 레니시타 잎이 깔린 광장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그녀의 유일한 아들이자 왕세자였던 플란츠 브리센의 최후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으나, 혁명군과의 전투 도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600년 전의 망령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을까, 같은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선 접어두고. 왜 내 형과 아리안느, 그리고 내 먹잇감을 채갔는지. 같은 호기심이 들었거든. 이유 없이 누구 죽일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거든.”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텅 빈 연두색 눈에 초점이 들어왔다. 인형이 깨어나 사람이 되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듯 했다. 그렇다면 인형에 숨을 넣는 마법봉은 총인가. 낭만이 없네. 따위의 생각을 한 베른이 잠시 소리내 웃고는 총으로 가볍게 툭툭 플란츠의 미간을 쳤다.

 

“당신과 나의 공통점. 윗 대가리가 욕심이 많고 지랄 같다.”

 

 피식, 플란츠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 같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베른은 다소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대충 2년 전인가, 한 여자아이를 구하려고 몸을 던졌어. 아이는 구했지만, 나는 빠르게 달려오는 트럭에 정통으로 치여 튕겨져 나갔지. 심하면 즉사, 최소 병원에서 몇 달은 처박혀 있어야 있어야 할 종류의 것이었는데. 몇 달은 무슨. 몇시간 만에 뼈가 완벽히 붙었단 소리를 들었지.”

 

 당장 검사해야 한다고 외치는 의사들에게 잡혀갈 뻔 한 걸 수습하느라 고생 했다니까. 베른은 총을 들지 않은 빈 손으로 자신의 목 뒤를 주무르며 가볍게 고개를 움직였다. 우드득, 하는 소리가 방 안에서 울렸다.

 

“그 때쯤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어. 내 머리카락이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는 걸. 마치 어느 순간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하.”

 

 인형 같은 얼굴에 언뜻 표정이 생겼다.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고, 더 해보라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쪽이든 자신의 말을 막으려 할 것 같진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구나 싶었지.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회복하고, 머리카락은 자라지 않고.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연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 흔한 판타지 소설보다 더 진부한 가정이 하나 떠올랐어.”

 

 실리케에 대해 조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당시 혁명군은 브리센의 모든 것을 지우려고 했기에 궁전, 온실 등의 건물들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모두 파괴했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자료들과 유물들 사이에서 베른은 끈질기게, 진득하게 브리센의 흔적을 더듬어갔다.

 

 실리케 브리센을 떠올리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르니에리 유리 온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실리케의 숨겨진 취미 중 하나는 고대 마법 연구였다. 브리센은 기사들에 의해 세워진 왕국이었고 그녀의 아버지인 에반 브리센 또한 수많은 기사들의 존경을 받는 기사 중 하나였으나 실리케는 기사가 아니었다. 역사학자들은 그녀가 기사가 아니었기에, 그들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대 마법에 대한 연구를 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조사를 하면 할수록 베른은 실리케의 연구 기록을 어디선가 본 듯 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봤지. 바로 떠오르지 않았으니 최근의 일이거나 집중해서 살폈던 것은 아니고. 지나가며 봤었나. 기억을 되짚어보던 베른은 자신이 지금껏 살면서 자주 지났던 곳을 되짚었다.

 데블란이 죽은 뒤 베른은 상속 및 유산 처리에 대해선 변호사에게 일임했다. 저택은 처분하지 않았지만 관리는 계속했다. 고용인들은 주인 없는 집을 지켰다. 유선으로 대소사를 정하던 저택의 새 주인이 저택에 들어오는데 제법 큰 결심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를 것이다.

 

“업보라는 말이 있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 돌아오게 되어있어. 개개인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이면, 주변에까지 피해를 주게 되. 고대에는 그것들을 다른 방향으로 틀기 위해 여러 시도를 했나봐. 600년 전이라면 모를까, 데블란이 그런 것까지 손을 대고 있을 줄 몰랐다니까.”

 

 오랜만에 찾은 본가이자 데블란의 저택을 찾은 베른은 천천히 집 안을 훑었다. 어릴 때는 커다란 감옥처럼 느껴진 곳이 지금은 평범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오고 싶진 않았는데. 집 안을 조사하던 베른은 데블란의 서재에서 기시감의 정체와 몇 권의 고서가 사라진 것을 찾아냈다.

 

 

 필요에 의해 좋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냈던 베른이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베른의 말을 듣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첫째가 아니었던가.”

 

 주어가 생략되었지만 베른은 그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짧은 말에서 베른은 여러 가능성을 지우고 하나의 확신을 가졌다.  

 

“글쎄, 업보가 어떤 시스템으로 된 건지 모르겠지만 나이 상으로 체이스 형님아 첫째는 맞아. 다만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이런 부분까지 따질 정도로 섬세한 건 아닐 것 같지만. 베른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멈췄다. 지금까지 찾아냈던 자료들과 플란츠의 반응을 통해 확신이 선 답을 내놓았다.

 

“600년 전 실리케는 실패했고, 흘러 넘친 업보로 인해 너는 죽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이 반복되려 하자 당신은 내 형님인 체이스와 아리안느를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고 데블란을 죽였지.”

“그래서.”

“죽지 못해 살아있는 당신이 시도해보지 못한 것.”

 

 철컥, 소리와 함께 베른이 쥐고 있는 총의 안전장치가 풀렸다. 베른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연두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읽었다.

 

“당신와 같은 불사에게 죽는다면.”

 

 플란츠의 눈꼬리가 곱게 휘었다. 베른 또한 플란츠를 따라 환하게 웃었다. 손에 쥐고 있는 총에 힘이 들어갔다. 방아쇠에 걸친 손가락이 움직였다.

 

 

 

 

 

 

 그냥 그런 어떤 날.

 

 플란츠는 발바닥에 닿는 모래들의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밀려들어온 바닷물이 플란츠의 발 밑을 간질였다. 복슬한 고양이의 꼬리가 제 몸을 부비는 것보단 거칠었지만 플란츠는 지금의 경험들이 새로웠다. 그 옆에 가만히 서있는 베른은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멀리서 온 바닷물과 모래사장이 만나며 나는 소리들을 들었다.

 

“외롭고 힘들었겠다.”

“…”

“말을 하지.”

“하면.”

“믿지 않았겠지. 맞아.”

 

 베른은 밤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려 얽힌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 어두컴컴한 밤바다의 바람은 매서웠다. 그들은 죽음을 빼앗겼으나 병에 걸릴 권리마저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나름 정성을 들여 키우고 있는 완두콩이 감기에 걸려 시드는게 아닐까 싶어진 베른은 자신이 걸치고 나온 쟈켓을 벗어 플란츠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바다를 보던 플란츠의 시선이 잠시 쟈켓의 주인을 향했다.

 

“난 당신 용서 안 해. 앞으로도 안 할 거고.”

“...알아.”

“근데.”

 

 플란츠의 고개가 다시 베른을 향해 돌았다. 베른은 여전히 바다를 보고 있었다.

 

“어떤 일은 일어날 수 밖에 없기도 해. 지진이나 해일처럼 인간의 힘으로 막아지지 못하는 것들. 그걸 사고라 불러. 당신이 그걸 막지 못했다고 해서 책임감 느낄 필요는 없어.”

 

 플란츠가 눈을 감았다. 멋대로 다가와 제 발을 적시고 빠져나가는 파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위로를 받아도 되는는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받아 두기로 했다.

 

“...그래.”

“말 잘 듣네.”

“짖지.”

 

두 사람의 발치에 닿는 물이 더 이상 차갑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오랫동안 밤바다에 서있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온 플란츠와 베른은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혼났다. 

 

 

 

 

 

 

 

 베른은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의 주인은 먼저 일어나 소파에 앉아 그의 곁에서 몸을 부비는 고양이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갔다 오기 딱 좋은 날씨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베른은 침대 옆 탁자에 올려 둔 머리끈을 쥐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자리 정리를 마친 뒤 테이블에 있는 컵에 찬 물을 따랐다. 잔에 물이 담기는 소리, 고양이가 고르릉 거리며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소리. 방 문 밖에서 시종들이 청소를 하는 소리.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점심 전에 나갔다 올까. 따위의 생각을 하던 베른의 귀에 툭, 하고 던진 단어가 들렸다.

 

“...미안.”

 

 아래로 향했던 연보라색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의 눈에 잘 자란 완두콩이 들어왔다. 초점 없이 텅 비었던 연두색 눈은 제 머리색을 닮은 반짝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반짝거림 안에 자신이 온전히 담겨있었다.

 

“그래.”

 

 그래서 받았다. 플란츠의 무릎 위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은백색 고양이가 애옹, 하고 울었다.

 

 

 

유일한 2차 글 백업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