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20150717 - 느아 비
2021-02-24 16:25

아가, 네 상냥함은 언젠가 독이 될꺼야. 너에게도, 네 주변에게도. 

 

 

 

 모험 초기 잠시동안 같이 다녔던, 타로카드 보는 법을 알려준 사람이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7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해했다. 

 

 

 

 순백의 세계에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한 날부터 간신히 묻어두었던 2개월 전의 악몽과 공포가 되살아났다. 죽어있는 동료들. 혼자 살아남았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그것은 조금씩 현실이 되어 주변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 신성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때와 똑같다. 아니, 그보다 더 했다. 그곳에선 유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만 지금은 탈출 조차 할 수 없으니 동료들이 다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지켜보는 것 뿐 이었다. 여전히 자신은 무능했다. 2개월 전의 사건으로 자신이 무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소한 것이라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작은 힘이 누군가, 어딘가에는 도움이 될 거라고. 틀렸다. 자신은 수많은 개미들 중 하나였을 뿐이고, 자신보다 강한 사람의 기분에 의존해 살아있었다. 

 

 그래도 후회하지않아. 내가 선택한 거니까. 감옥에 끌려가는 것도, 고문을 받은 것도 자의였다. 무사히 빠져나갈 기회도 있었지만 혼자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악몽을 현실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선택을 하려는 순간 오래된 그림 일기장을 훑어보는 것 처럼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부모님이 떠오르고, 할아버지가 떠오르고, 마을 사람들이 떠오르고... 마지막에는 베이론이 떠올랐다. 나를 걱정해주고 사랑해주는 고마운 사람들. 알고 있다. 이 선택이 자신을 믿어주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씻어낼 수 없는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아집(我執)이고 자기만족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편해지고 싶었다. 마음 속 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나는.

 

 

 

 걱정해주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자신이 쓰는 207호의 문을 닫자 다리의 힘이 풀렸다. 왼손을 들어올려 조심스레 왼쪽 귀가 있던 곳을 만졌다. 당연히 만져져야 할 것이 잡히지 않았다. 여기, 귓볼이 있었는데.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말랑한 촉감이 느껴졌다. 다시 왼손을 움직였다. 손 끝이 허공을 맴돌았다. 벌벌 떨리는 손을 움직여 붕대 위를 더듬었다. 어느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귓구멍의 입구만이 그 자리에 귀가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목이 메어왔다. 아파. 아파.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나며 눈 앞이 뿌옇게 변해갔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아픈 것을 티내는 순간 동료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알고 있으니까.

 

 왼 팔의 흉터가 아파왔다. 자신을 비웃는 듯 했다. 반복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행동했으나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었다. 2개월 전으로부터 조금도 발전하지 않았다. 걱정해주는 동료들에게 했던 말을 자기 자신에게 할 수 없다. 누가 착하다는 거야. 누가 상냥하다는 거야. 나는 이기적인 꼬맹이일 뿐인데. 스물스물한 검은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는 듯 했다. 숨이 막혀왔다. 작은 소리라도 내지 않기 위해 입을 막았다. 손 위로 차가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자신은 아직 살아있다. 여신님의 가호가 미치지 않는 이곳에서도 여신님이 자신을 돌봐준 것일까. 고통이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왼팔을 들어올렸다. 뿌옇게 변한 세상에 잊지 않기 위해 남긴 상처를 담았다. 기억하기 위해 남긴 흔적. 

 

...잊을리 없잖아.

 

 누군가의 손짓 한번에 스러질 가벼운 목숨일지라도 자신을 필요로 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은 살아남아야했다. 기다리는 사람을 위해서. 이곳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들이 무사할 수 있다면 자신은 기꺼이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설렁 그들을 상처입히는 행동이라 해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두번 더 말했으니 네배 더 괜찮아졌다.

 

 

 

 아슈르가 말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괜찮아. 기도문 마냥 중얼거렸다. 다른사람들이 무사하잖아.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가장 강력한 독은 자신이 그 독에 중독되었음을 모른채, 천천히 잠식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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