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링.
왜?
웃으면서 우는 것 같아. 달링이 담배를 필 때는 늘 그런 표정을 짓더라.
미안, 걱정시켰네. 곧 저녁 먹을 시간이지? 조금만 있다 나갈게.
담배 연기로 자욱한 방의 환풍기를 틀고 의자에 앉아있는 그를 껴안았다. 남자는 한 모금을 더 마시고 들고 있던 꽁초를 재떨이에 넣었다. 자신의 남편은 술, 담배를 거의 하지 않고 가족을 아끼는 이상적인 남자였으나 한 두 달에 한번은 하루 종일 담배를 피곤 했다. 그동안 못 핀 담배를 이날에 몰아 핀다는 듯이, 그 날은 방에서 나오지 않고 담배만 피면서 하루 종일 글만 쓰곤 했다. 결혼 초기에는 그것이 너무 싫어 자주 싸우곤 했다.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자 동정으로 변했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남자였지만 이 때 만큼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의 남편은 20대 초반에 바이러스로 부모를 잃었다. 그 후 폐쇄 구역을 겪었고, 살아남았다. 그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런 일을 겪었던 사람 이란걸 몰랐을 것 이다. 그런 과거가 있다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고 자상한 사람이었으니까.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었으니까. 고민 끝에 고백하자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좋아해줘서 고마워. 나는 네가 생각한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네 소중한 인생을 내게 맡길 가치가 있을 지도 모르겠고. 자신이 없어. 이런 나라도 괜찮으면, 음.. 조금의 시간을 줄 수 있을까?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
자신의 남편은 늘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줬다. 오늘은 뭘 했고 누가 어떤 일을 했었고 저럴 때는 저랬었다. 식사 시간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질문을 해도 아는 선에서 대답을 다 해줬고, 과거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말해줬다. 단 하나, 폐쇄 구역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선 말을 피하곤 했다. 폐쇄 구역을 겪었다고 말해줬으나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은 피하곤 했다. 어림짐작으로 끔찍한 일이 있었나보다 생각했었으나 결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뒤척이던 그가 잠결에 중얼거리던 이름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그곳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다.
남편은 화를 잘 내지 않았다. 분노라는 감정이 있을까? 하던 시절도 있을 정도로 늘 웃었고 힘들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와 15년 동안 함께 살면서 화난 모습을 본 적은 단 한번 뿐이었다. 딸이 자동차 사고를 당해 병원에 실려가던 모습을 본 그는 가해자에게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자신의 옆을 지나쳐 병원으로 향했다. 그 때 언뜻 그 이름을 들었다.
'■■■보다 못한 새끼.'
딸이 다 회복되고 한참 뒤에 조심스레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가 누구야? 라는 말에 그는 내가 고백했을 때 지었던 표정을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취미로 글을 쓰곤 했다. 다 쓴 글을 나에게 보여주고 평가 해달라고도 했었다. 어떤 글은 아이가 좋아하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글이었고, 어떤 글은 문체에서 피 냄새가 날 정도로 잔혹했다. 내 제안으로 웹에 글을 올리자 괜찮은 반응이 돌아왔다. 그것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쉬는 날에 틈틈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글을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독자였다. 많은 글을 읽었다. 그러나 읽지 못하는 글이 하나 있었다. 늘 노트북에 쓰는 남자였으나 담배를 피는 날에는 원고지에 글을 쓰곤 했다. 그것은 내가 읽지 못하는 글씨로 쓰여있었다. 호기심에 한국어를 배울까 했지만 그 생각은 접었다.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뜨자 햇빛이 창문을 타고 내려오는 방이 보였다. 가구에는 먼지가 소복히 쌓여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방을 천천히 걸었다. 사람이 오랫동안 살지 않은 것 같았다. 안을 둘러보는 중년 남자의 코 끝에 진한 담배 냄새가 잡혔다. 냄새를 따라가니 눈 앞에 작은 철문이 보였다.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철컥. 문이 열렸다. 남자는 철문 너머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이 나무 판자로 변했다. 한걸음을 옮길 때 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그의 눈 앞에 낡은 소파가 보였다. 그리고 은발의 머리가 보였다. 담배 연기는 은발의 남자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자가 하,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남자의 옆에 털썩 앉았다. 먼지가 흩날렸지만 은발의 남자는 옆자리에 앉은 남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담배를 피고 있었다. 흑발의 남자가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담배의 끝이 타들어갔다. 한 모금 깊게 마시고 내뱉었다. 하늘하늘 떨어지고 있는 먼지를 보던 남자가 말을 꺼냈다.
야.
은발의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늙었는데 너는 변한게 없네.
남자는 대답 없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말을 건 남자에게 시선 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손에 든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내 딸이 이제 13살이야. 나만큼 멋진 아빠가 없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더라. 귀여워. 이게 딸 키우는 재미인가봐.
흑발의 남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계속 했다. 자신의 딸이 학교에서 1등을 했다는 이야기. 같은 반 남자애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이야기. 부인과 함께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 최근에 쓴 글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 그동안 있었던 일을 풀어놓았지만 듣는 청자는 대꾸도 없이 계속해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또 하나의 이야기를 끝마치고 새로운 담배를 꺼내며 남자가 말했다.
잘 살고 있냐.
불을 붙였다. 두 남자가 태운 담배 때문에 방 안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말했지. 나는 잊지 않는다고.
눈 뜨면 사라질 환상이었으나 이 시간 만큼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