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뻗자 시종이 예복을 들고 다가왔다. 새벽에 온 편지들을 확인하는 사이 시종은 능숙하게 옷을 입혔다. 주인의 시간에 방해되지 않도록 빠르고, 정확하게. 탁자 위에 편지를 내려놓을 때 시종은 예복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손을 뻗자 미리 준비해둔 머리끈을 올렸다. 손에 끈을 쥔 채로 편지 옆에 있는 서류를 눈으로 훑었다. 나무 빗을 가져온 시종은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빗질을 끝내고 망토를 가져올 때 남자는 머리를 묶었다. 옆에 놓아둔 예장 검을 들자 어께 위로 망토가 둘러졌다. 허리에 검을 걸친 뒤 서류를 서랍에 넣고 몸을 돌려 방문을 열고 나가는 남자의 뒤로 시종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시종을 보지 않았고, 시종은 단 한 번도 남자의 몸에 닿지 않았다.
복도를 걷는 남자의 보폭은 일정했다. 그가 사무실로 가는 시간은 정해져있었고, 그 시간을 방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1년간 남자의 밑에 수많은 기사들이 실려 나갔다. 이유는 제각각이었으나 그의 기준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이 근본적인 이유이었다.
재력의 문라이즈, 풍요롭고 넓은 토지를 가진 바그알, 마당발이라 불릴 정도로 인맥이 넓었던 에루발. 당시 세 백작가의 주인들은 우애가 깊고 서로의 단점을 채워 함께 발전하는 것이 기사단의 설립 목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목표는 퇴색되어가고, 욕심 많은 선대 문라이즈들은 조금씩 에루발 가문의 인맥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한번 금이 가기 시작한 세 백작가는 정(情)보다 이득을 위해 움직였고, 그것이 기사단 내 파벌싸움으로 번져가기 시작한지 백여 년째. 살얼음 판 위를 걷고 있는 와중에도 대외적 이미지는 좋아지는 것이, 자기들끼리 싸우는 와중에도 맡은 일은 제대로 처리해 신뢰도를 꾸준히 올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새롭게 기사단에 들어온 기사들은 어느 가문을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었다.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 난 뱀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드페리옹 경."
"죄, 죄송합니다!"
붉은 머리의 남자, 데킬라는 자신의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있는 금발의 남자를 무시한 채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남자 뒤로 서있는 기사들은 눈을 내리깐 채 소리 없이 손을 움직여 대화를 하고 있었다. 또? 또 그랬대. 흑발의 남자가 검지를 빙글 돌렸다. 정신 못 차렸나봐? 깃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드페리옹과 그 뒤에 있는 기사들의 입 안에 침이 바짝 마르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기사단장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감히 들 수 없었던 것은, 고개를 드는 순간 어떻게 되는지 선례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서명까지 마무리 지은 뒤 깃펜을 내려놓고 편지를 접어 봉인까지 한 데킬라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있는 드페리옹을 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봉인해둔 편지를 드페리옹 뒤에 있는 기사에게 건넸다.
"에드가 경. 자네가 제안한 건에 대한 답이다."
편지를 건네받은 에드가는 작게 목례를 하고 방에서 먼저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기사의 뒷모습을 보던 데킬라는 아직 허리를 숙이고 있는 기사를 보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으로 눈앞의 남자를 파악하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가장 의심스러운 자는 가장 가까이 두어 감시하는 것이 대처하기 편하다. 머릿속에서 사건들의 전말과 앞으로 일어날 일,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드페리옹 에루발 경은 지금부터 내 호위를 맡도록. 다른 기사들은 물러가도 좋다."
문라이즈 저택 응접실 안에 두 명의 여인 중 한명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고, 다른 한명은 뾰루퉁한 표정으로 무릎 위에 올려놓은 서류의 끝자락을 만지고 있었다. 여인의 찻잔이 절반정도 비워졌을 무렵, 응접실 문이 열리고 기사단 정복 차림의 데킬라가 들어왔다. 시종이 다가와 빠르게 망토를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보던 차를 마시던 여인,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약속 시간에 늦다니, 너 답지 않은데."
"멍청한 녀석이 쓸데없는 실수를 해서."
데킬라가 빈 소파에 앉자 옆자리에 시종이 다가와 찻잔을 준비하려 했으나 작게 손을 휘저으며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시종은 작게 고개를 숙이고 실비아의 잔을 채운 뒤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벽난로 안의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방 안에 남아있는 세 명의 문라이즈 중 먼저 침묵을 끊은 것은 서류 끝자락을 너덜너덜하게 만든 헬렌이었다.
"드페리옹 에루발은 어때?"
"검에 대한 재능은 제법 있어 보이나, 그 외의 부분은 미숙하다. 그것조차 거짓일 수도 있지만."
"생긴 건 순해 보이더니 얼굴 값을 하네."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으면 제법 키울 맛이 났을 텐데~ 라며 아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헬렌을 무시하고, 실비아가 입을 열었다.
"3주 뒤, 화합이 있는 건 알고 있겠지. 기사단장으로 참가하는 건 처음이겠네, 데킬라."
"알고 있다. 덕분에 마차 안에서도 서류를 작성하고 있지."
"네 성격만 보면 일 년도 못 견디고 그만둘 줄 알았는데- 의외야?"
"계약은 지켜야 하니. 바그알 가문에서 서신이 오지 않았나? 슬슬 도착했을 텐데."
"정답. 낮에 찾아왔어. 뭘 한거야?"
데킬라가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에드가 경이 재밌는 제안을 해서. 나흘정도 더 지나면 비슷한 이유로 에루발 가문에서도 전령이 올 거다."
"헤에- 에드가 경이 낸 아이디어였어? 어쩐지~"
"덕분에 움직이기 편해졌어. 바그알 가문 녀석들은 전부터 소문에 예민했으니까. 거기다 지금은 2사단이 지키고 있을 때 잖아? 이 보고를 받은 엘란드의 표정이 어떻게 썩었을지 직접 봤어야 했는데- 아쉽네."
세 백작가가 연합하여 세운 베르무트 기사단은 인원이 총 3개의 사단으로 이루어져있다. 그 중 바그알 가(家)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는 곳은 2사단. 유난히 소문에 예민한 현 엘란드 바그알 백작은 작위를 받은지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원로들과 기싸움 하면서 화합을 준비하고 있을 바그알 백작은 신경 써야 할 것이 늘어나 비명을 지르고 있을 것이다. 그 가문 원로들이 좀 깐깐하지. 헬렌이 꺄르륵 웃으며 무릎 위에 올려둔 서류를 접어 벽난로로 던졌다. 불에 타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헬렌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사랑에 빠진 도련님, 매일매일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를 어째! 큰 나무 옆 아가씨는 옆마을 아가씨를 좋아한대요♪
노래를 듣는 데킬라는 속으로 혀를 찼다. 가사 속 옆마을 아가씨는 지금 노래를 부르고 있는 헬렌이었다. 조금 전 벽난로에 던진 서류는 내용을 보지 않아도 훤했다. 허나, 그것은 자신이 신경 쓸 영역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문라이즈 중에서 자신의 외모를 가장 영악하게 쓰는 자가 헬렌이었다.
"제 앞가림도 간신히 하는 녀석들을 가지고 놀려니 지루하다- 예전이 더 재밌었던 것 같아. 어때? 지금이라도 싸울래?"
"생각 없다. 이제 1사단 군수품을 빼돌린 녀석들을 잡아야 해서. 헬렌, 부탁한 건 어떻게 되었나."
"그거- 일주일 정도 더 시간이 필요한데. 확인이 끝나는 대로 브리안을 보낼게."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실비아가 웃었다.
"문라이즈가 다 가져갈 필요는 없어. 하지만, 누가 위에 있는지는 알려줘야지."
기사단장으로 재임해 있는 동안 단 하루도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제 스승인 라스는 이런 걸 어떻게 8년이나 해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와중에 자신과 대련도 꾸준히 했지. 자신은 형과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 말했으나 이런 면에서는 바질과 똑같았다.
지금 걷고 있는 곳은 바질이 죽기 전 자신에게 남긴 별장이었다. 별장 근방의 숲은 모두 자신의 땅이었고, 문라이즈의 이름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금했다. 숲 관리인과 별장을 관리하는 오래된 시종 두 명이 전부였다. 10여년 만에 가진 휴식이었지만 매일 바쁘게 움직이던 것이 몸에 배어 있어 시간을 죽이는 것이 어색했다. 2주 전부터 별장에서 지내고 있는 꼬마들이 아니었으면 검을 들고 최전방으로 뛰어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쓸데없이 자식만 많이 낳았단 말이지. 숲을 걸으며 별장 내 손님 방에 누워있을 꼬맹이 셋을 생각했다. 실비아의 자식이 둘, 헬렌의 자식이 하나. 문라이즈의 이름을 받은 세 꼬마의 나이는 각각 10살, 8살, 6살이었다. 셋 다 검술에 대한 재능이 제법 있어보였지만 아직은 어린 아이었다. 최소한 열개의 시험은 끝내야 완전히 내쫓을 수 있을 터. 아침 훈련을 핑계로 목검으로 잔뜩 두들기고 나왔으니 저녁까진 조용할 것이다. 식사 시간까지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잠시 걸을까.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매일 익숙하게 봐온 풍경에 익숙해진 그는 나뭇잎의 일부가 기이하게 반짝이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데킬라, 펜던트를 보여라."
기사단장으로 취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자신을 갑작스레 불러 하는 말이 펜던트를 보이란 말에 기가 찼으나, 그의 말을 거절할 이유가 없어 주머니에서 낡은 펜던트를 꺼냈다. 해적선에 가득 채워진 보석들이 새겨진, 두 남자가 지켜보기에는 싸구려 펜던트이나, 그 안에 담겨있는 공통의 기억은 감히 가치를 매길 수 없었다.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제 손바닥보다 작은 펜던트를 조심스레 쓸어내리는 모습이 어색했다.
눈앞의 남자가 이렇게 약해보이던 적이 있었던가? 40대 후반의 나이 든 귀족 마법사처럼 보이는 눈앞의 남자의 실제 나이는 올해 60이었다. 문라이즈 가문 역사상 유례없는 불 속성의 아크메이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서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권위적이었던 자가 지금 같은 행동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남쪽에, 작은 별장이 하나 있다."
"예."
"라스도 모르는 곳이지. 실리엔과 제법 가까워."
"...예."
"서류는 준비해두었다. 네가 쓰도록."
나가라는 무언의 명령이 들렸다. 눈앞의 남자가 손에 쥔 펜던트를 돌려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 한숨을 집어삼켰다.
"검을 뽑는 무례, 용서하시길."
허리에 찬 예장검을 뽑아 길게 흘러내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의 끝을 잡아 베었다. 레이첼의 머리색을 그대로 가져온, 검 끝에 박혀있는 보석보다 더 붉은 머리카락들이 서재에 흩날렸다. 손에 남아있는 머리카락 한 묶음을 펜던트 위에 내려놓았다. 뭐하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보는 남자에게, 감히 꺼내놓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낡은 말을 꺼냈다.
"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해할 생각조차 없습니다. 소중한 것은 죽여야 한다는 가르침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남자는 무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어릴 적 크게만 느껴지던 백작이 지금은 한명의 남자로 보였다.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지금의 나는, 데킬라 문라이즈 라는 이름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선 감사해야 될 것 같군요."
데킬라는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려 서재 밖으로 나갔다. 닫힌 서재 문을 보던 바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바질 문라이즈 백작이 레이첼의 곁으로 떠나기 3일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바질 문라이즈(전 백작, 데킬라 애비), 라스 문라이즈(전 베르무트 기사단장, 데킬라 스승)
실비아 문라이즈(현 백작, 데킬라의 셋째누나), 헬렌 문라이즈(데킬라의 넷째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