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다.
차혁은 지독하다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폭우는 지독하다는 말을 제한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폭우로 인한 긴급 재해 방송을 이어가고 있었고, 작업실 창 밖의 풍경은 우울한 회색 및 구름과 쉼 없이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전부였다. 환기 및 습도 조절 관련한 설비를 잘 해둔 작업실이었지만 이정도 폭우와 습기까지 대비해둔 것은 아니었다. 조각을 끝낸 뒤 여러 칠을 하며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처리를 한다지만 이래서야 작업을 하는 과정에 목재가 망가질 판이었다.
차혁의 시선은 창문에서 책상 위에 올려둔 달력으로 옮겨졌다. 약 삼일 뒤 날짜에 붉은 색 펜으로 그려둔 동그라미 표시. 이래선 마감 기한에 맞출 수 없겠는걸… 작게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들었다. 일부러 늦는 것도 아닌데, 클라이언트도 이해해주겠지.
I호텔이 재단장을 하면서 스카이라운지에 전시할 조각품을 요청했던 것이 약 2주 전. 급하게 들어온 만큼 보수도 넉넉하게 쥐어줬기에 군말 없이 승낙했었다. I호텔의 로고와, 두 사람이 화합하는 모습을 원했지. 적당히 상업적이고 적당히 있어 보이는 듯한, 그런 조각. 차혁의 머리 속에는 눈 앞에 있는 깎이다 만 나무 목재가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그려지고 있었다. 문제는 습도였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차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스럽게도 클라이언트 역시 폭우 때문에 걱정이 많은 듯 했다. 폭우가 끝나는 대로, 그리고 작업이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을 해달라던 클라이언트의 말을 메모해두며 그 다음 일정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오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폭우가 끝나야 조각이 되었든, 중개업이 되었든 일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 차혁의 한숨이 깊어져만 갔다. 창 밖에 보이는 회색 빛 하늘이 마냥 원망스러웠다.
보름간 쉬지 않고 내렸던 폭우가 끝난 뒤, 소위 안전지대에 대한 문자를 받은 차혁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심심한 누군가의 장난질이겠거니 싶었다. 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과 이상한 문자에 대해 말을 했을 때도, 그 문자가 안전지대에 관한 문자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그저 우산을 챙기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 늘 들고 다니는 가방 안에 작은 우산을 하나 넣게 된 것 정도였다.
그렇게 지나갈 뻔 했지만, 간만에 들린 회사 직원들 중 이번 폭우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직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차혁은 안전지대에 관한 문자가 왔던 것을 떠올렸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었을 텐데,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흥신소에 의뢰를 넣게 된 것은 이런 찝찝함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의뢰를 넣으면서도 이게 과연 성공할까? 싶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미묘한 찝찝함을 지울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성공했다, 실패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지금처럼 마냥 애매한 감정을 가지고 있진 않을 테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흥신소 사장은 날을 소개시켜주면서 그 또한 그런 문자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거 참, 이걸 좋아해야 하나.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복잡 미묘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을지도 몰랐다.
그에게 생츄어리를 맺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자신이었다. 상대가 어떻든 간에 생츄어리를 맺고 끊음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고, 일종의 수단이자 보험으로 쓰던 차혁이었지만 몇 번의 대화를 나누면서 그에 대한 호감이 꽤 쌓였다. 이번 생츄어리는 꽤 좋은 느낌으로 남을 것 같았다. 대화를 하면서 보이는 반응이나, 긴 시간 고민하면서 내놓는 답이나, 내놓은 답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는 점에서.
살다보면, 특히나 사업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빈 말을 해야만 하고, 상대의 비위를 맞춰주며 그 밑에서 제게 콩고물이 떨어지길 기다려야 할 때가 많았다. 말 하나에서도 이 말 뒤에 뭘 원하는 걸까, 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래서 차혁은 날처럼 느리더라도 솔직하고 담백한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사람이 편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정이 아니면 그와 같이 다니며 조금 더 다녀보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보고 소재들을 이끌어내고 싶었다. 동시에 궁금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을 그도 느끼고 있을까?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어떻게 표현할까.
예술가란 족속들이 그렇다. 불행과 결핍 등 자극적이고 신기한 것들을 보면 지나치질 못한다. 어느 순간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거나 상실하기 쉬운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이상 더더욱 그럴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 안에 차혁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생츄어리를 해제한 순간 사라질 그 영감들이 조금 아쉬웠다. 그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차혁은 눈 앞에 펼쳐둔 커다란 종이를 바쁘게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예술가가 그런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차혁 개인의 생각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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