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키보다 다섯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랗고 검푸른 유니콘의 위치를 확인한 르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난 관심도 없는데… 작게 투덜거리며 지팡이의 천을 풀어 묶었다. 늘 짓고 있던 미소가 없어지고, 제 키만 한 지팡이를 들어 유니콘을 똑바로 가리켰다.
“나쁜 감정은 없어. 나도 원해서 하는게 아니고.”
덩치는 다르나 기본적인 골격은 말의 것과 유사한 몬스터. 즉, 신체 구조는 유사할 것이다. 땅을 디디고 다니는 생명체의 약점은 발. 빠른 돌진공격을 한다면 그 발을 쓰지 못하게 하면 된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의 효과를 볼 것.
지팡이를 겨눈 곳은 유니콘의 왼 앞다리.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어 몬스터는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 듯 했다. 푸드득 소리를 내며 발을 구르는 유니콘의 다리 뼈 구조가 머리 속에 그려졌다. 우선, 완관절(앞무릎) 부터.
우지끈, 소리와 함께 유니콘이 휘청였다. 흥분한 유니콘은 주변이 떠나가라 하울링을 하며 적을 살폈다. 그 사이에 르노의 지팡이는 오른쪽 앞다리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남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굉음과 함께 유니콘이 무릎을 꿇자 옅게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얼굴이 보이는군. 좀 작으면 번거로운 짓 없이 한번에 목 뼈를 끊었을텐데. 르노의 지팡이가 목으로 향하는 순간 유니콘과 눈이 마주쳤다.
파지직, 소리와 함께 유니콘 주변에 푸른 장판이 생기기 시작했다. 피하기엔 너무 늦었어, 그렇다면. 지팡이를 강하게 쥐며 목 뼈의 구조를 그리고, 부쉈다.
“아야야… 하필이면 내가 있는 쪽으로 쓰러지다니… 머리도 탔잖아?!”
죽은 유니콘 시체 밑에서 나와 투덜거리며 먼지를 털다 머리 끝이 동그랗게 말려진 것을 보며 르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첫날에 도망갔어야했어. 이게 뭐람. 허리아퍼. 온몸이 쑤셔. 성당갈래. 찡얼거리며 눈 뜬 채로 죽은 유니콘의 눈에서 반투명의 광물을 챙겼다. 들어가서 쉴래. 누울래. 이쁘고 잘생긴 사제님들에게 치료 받을래~~ 쉴새없이 중얼거리며 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
르노는 드래곤과의 대화가 생각보다 평범하면서도 재밌었다고 생각했다. 외형에 속을 자신이 아니었으나, 소년 같은 외모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분위기, 아이 같으나 대화하는 도중 느껴지는 비인간적인-인간이 아니니 틀린 말은 아니다.- 사고방식. 언제 이런 존재와 대화를 해보겠는가. 된다면, 이곳에 눌러앉아 드래곤이 쫓아낼 때까지 대화를 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있어 대화란 세계의 확장이었으므로.
마법사의 대부분은, 지식욕이 왕성해 새로운 지식을 얻는 걸 좋아한다. 이는 엘리멘탈마스터, 네크로멘서 구분 없이 마법사라면, 아니 마법사가 되기 위해서라면 응당 가지고 있으리라. 르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너는 이 세계를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바람 중 하나지. 지성을 가지고 사고하며 대(代)의 이어짐인 존재.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 네가 생각하는 「이 세계」는 뭐야?”
“세계, 말인가요.”
“가령 예를 들어 이 세계를 부수려는 존재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의 소망과 이념은 옳을까?”
“흠… 저는 제 인생의 3분의 1을 이 넓디넓은 대륙을 돌아다니는데 썼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은 많지요. 이렇게나 넓은 세계를 부수려한다고요? 제게 있어선 감히 상상하기 어렵네요. 그들에게 있어 부순다는 단어의 정의가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들이 왜 부수려하는지도 궁금하네요. 왜 그러려는 걸까요? 아무런 이유 없이, 화풀이로 부수려하는 건 아닐 터. 그런 분들이 정말로 계신다면 이야기를 해보고 싶군요. 분노했다면 그 원인을, 미워한다면 미워하게 된 시작을 알고 싶군요.
저는 네크로멘서. 살아있는 생명보다 죽은 존재들을 찾아보고, 연구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그런 족속이지요. 위대한 드래곤이시어, 이 땅의 상징이시여. 저는 당신이 뜻하는 것에 반대되는 곳에 서 있습니다. 그림자 속에 숨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불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에게 묻는다면.”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현실적인 이곳의 풍경. 너무나도 풍요롭고, 아름답고, 그 중심에 있는 소년. 수다를 좋아하는 자신이어도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은 거를 줄 안다. 허나,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선 자신의 일부를 파보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법.
살아있는 존재는 언제나 위를 향한다. 높은 지위, 많은 부, 끝없는 지혜… 추구하는 것은 달라도 그 끝은 결국 하늘을 향해있다. 높이 올라가기 위해선 타인을 밟고 올라서야했다. 당연한 이치었다. 높은 곳에 있는 존재 일수록 고개가 아래로 향할 일이 거의 없는 것처럼. 반대로 죽음은 공평했다. 아체르나르의 여왕도, 성역의 고아도, 페일론의 갑부도, 라그투스의 해적도 죽으면 땅으로 돌아간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살아생전 땅을 모르는 듯한 존재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하늘이 아닌 땅.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렇게 넓어보이던 아카데미가 좁아보였다. 그곳에 더 있을 수 없었다. 더 넓은 세상을, 더 많은 사람을 보고, 그 끝을 알고 싶었다.
“이 세계는 모두에게 공평합니다. 저는 그런 이 세계를 사랑합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어떤 이야기이던지 끝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제게 있어서 세계란 일종의 순환이라 할 수 있겠군요.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 평생 위를 바라보며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그것이 부분이 되고, 전체가 되고. 그 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종의 쳇바퀴 안… 이라 해야 할까요?”
제 대답에 만족하셨을지, 모르겠군요. 르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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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놓여있는 시체를 보고 혀를 차며 작게 성호를 그었다. 부디 여신님 곁에서 편히 잠들기를. 고작 5살도 안되보이는 소년의 마지막 표정은 누군가를 원망하는 듯 했다. 아이가 쳐다보고 있던 것은 누구였을까. 죽기 직전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였을까. 누구를 원망했을까. 착잡한 마음으로 몸을 숙여 죽은 아이의 눈을 감겼다.
세계는 공평하다. 그렇기에 세계는 불공평하다.
두 문장이 모순임을 르노는 알고 있었다. 가난한 집 아이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좋은 집에서, 좋은 부모님 아래에서 행복한 삶을 원한다. 그 끝이 좋을지 안좋을지 알 수 없는 채 막연히 그러한 미래를 그린다. 사람들은 이것을 ‘꿈’이라 불렀다. 꿈을 잡기 위해 손을 뻗거나 상상하며 하루를 견뎌나간다.
가엽지 않은가. 사랑스럽지 않은가.
아카데미 밖, 아체르나르 밖은 상상 이상이었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그때 알았다. 세상은 생각보다 더 잔인했고, 이기적이었다. 서로를 잡아먹고, 짖밟고, 헐뜯고, 죽인다. 약육강식이란 그랬다.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카테미로 진학해 학생들과 교수들 사이에서 지내던 르노에게는 또 다른 충격이었다. 자신의 세상이 넓어지는 그 쾌감을 잊을 수 없었다. 더, 더 느끼고 싶어.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알고 싶은 것이 너무나도 많은 반면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짧았다. 그래서 걷기 시작했다. 더 많이. 더 많은 것을 내게 보여줘.
길을 걷던 도중 자신을 붙잡고 도와달라며 울던 아이가 있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해 지저분한 소년이었다. 앙상하게 마른 아이가 자신을 올려다보며 애원하는 모습을 보며 르노는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자신의 모순을 깨달았다.
르노는 바닥에 앉아 주변에 있는 모래를 모아 작은 둔덕을 만들었다. 그 위에 돌멩이를 올려두자 뾰족했던 끝이 일그러졌다. 톡, 하고 밀어내자 언덕 위에서 돌멩이가 구르기 시작했다. 땅으로 내려온 돌멩이는 멀쩡했으나 모래는 처음의 형태를 잃었다. 돌을 손에 쥐었다.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을 작은 생채기들을 제외하곤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돌을 만지던 르노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돌을 무너진 모래 언덕에 던졌다. 잔해 위에 돌 하나가 남아있었다. 그 모습이 세계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이제 걸어야 할 시간이었다.
예정에 없었던 귀향이었다. 정확하게는 귀향 보단 목적지를 위해 잠시 들린 것이 옳은 표현일 것이다. 부모님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주변 지인들에게 인사를 했을 뿐인데 일주일이 지났다. 아체르나르의 겨울은 다른 곳 보다 더 혹독하기에 떠날 준비를 서둘러 마쳤다. 이번 목적지는 북쪽 끝, 노이르. 동행할 일행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