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20180219 - 일라이저
2021-02-24 15:41




 다녀왔어요. 튼튼한 나무 문을 열자 방 안의 훈훈한 공기가 제 몸을 반겼다. 어께와 머리 위에 쌓인 눈을 대충 털고 들어가려는 일라이저에게 에버니저가 다가왔다. 그가 미처 털지 못한 눈을 털어주려던 에버니저는 코 끝을 찌르는 진득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찌푸리는 모습을 보고 일라이저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자각했다.
 "아, 옷부터 갈아입고 와야겠네요. 하는 김에 씻고 올께요."
 일라이저는 웃으면서 에버니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멈췄다. 자신의 손에는 아직 몬스터의 체액이 조금 남아있었다. 일을 더 늘릴 필요는 없지. 에버니저의 머리 근처에서 목적을 잃은 일라이저의 손이 조금 뒤로 물러났다가 허리 뒤로 숨겼다. 
 금방 다녀올께요. 일라이저는 장갑을 벗어 왼 손으로 여분의 옷을 잡아 방 밖으로 나갔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잠들어있는 여신께서 악몽을 꾸고 있는게 아니냔 불평이 나올 정도로 혹독하고 길었다. 타인에게 각박해지기 쉬운 날씨였음에도 사람들은 변방의 작은 마을에 온 두 성직자를 위해 기꺼이 장작을 모으고 아껴둔 식량을 꺼내왔다. 꺼내온 물건들이 그들에게 어떤 것임을 알기에 에버니저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치료와 기도를, 일라이저는 마을을 위협하는 몬스터를 토벌했다.
  살아있는 몬스터는 위험하지만 죽은 몬스터는 긴 겨울을 나는데 도움이 될 자원이 된다. 일라이저는 몬스터들의 어떤 부위가 어디에 효과가 좋은지 그 용도를 잘 알고 있었다. 마을 사냥꾼들의 도움을 받아 몬스터를 토벌하는데에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일라이저가 사냥꾼들과 함께 몬스터를 처리하는 동안 에버니저는 마을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살폈다. 다친 사람들을 치유하고 마을에서 가장 큰 회관에서 사람들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두 사람에게 당연히 행해야할 의무들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얼어붙어있던 마을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여신께서 우리를 도우셨어. 아이들은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고 어른들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따듯한 양송이 감자스튜, 호밀빵, 유별나게 많이 쌓여있는 찐감자의 탑.
 이 많은 찐감자는 다 어디서 나온 거지? 제법 높게 쌓여진 찐감자를 보며 일라이저는 혀를 찼다. 반면 에버니저는 꽤 즐거워 보였다. 뭐, 상관없나.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들을 정리한 일라이저는 아직 젖어있는 머리를 오른손으로 두어번 털어내며 식탁에 앉았다.
 사실 일라이저에게 있어 식사는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조금은 번거로운 행위에 가까웠다. 아주 어릴 적, 제대로 된 이름 조차 없을 때의 그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입에 넣었다. 음식의 질을 따진다는 생각조차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성당에 들어간 뒤에야 양과 질을 따질 수 있게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를 튼튼하게 태어난 덕분에 음식을(혹은 그에 가까운 무언가를) 먹다가 탈이 난 적은 거의 없었다. 죽을 고비를 넘길 뻔한 적도 있었지만 여신이 자신을 돌본 것일까. 어떻게든 살아 현재에 도달했다.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종류를 가리지 않는 자신과 달리 에버니저는 음식을 꽤 가렸다. 정확하게는 어느정도 조리된 음식이라 부르는 것들을 선호했다. 그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에겐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동행자 덕분에 굉장히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들을 꽤 긴 기간 꾸준히 먹게 되었다.
 
 두 사람이 자신의 앞에 놓여진 그릇들을 비웠을 무렵, 방 문이 열렸다. 마을 주민이었다. 손에는 얇은 폭찹이 담긴 접시가 하나 있었다. 덕분에 자신의 아이가 살았다며 괜찮다는 말에도 몇번이나 감사 인사를 하며 맛있게 먹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마을 사람이 방 밖으로 나갔다. 에버니저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앗."
 데구륵, 껍질이 벗겨지다 만 찐감자가 식탁 위를 굴러가 일라이저의 앞에서 멈췄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감자에서 나오는 열기는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일라이저는 자신의 앞에 놓인 감자를 아무렇지 않게 집어 껍질을 뜯었다. 벗겨진 껍질에서도 뜨거운 김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평온했다. 이상하다. 뜨거울텐데. 에버니저가 고개를 기울였다.
"안뜨거워요?"
"이정도는 별거 아니에요."
 순식간에 손에 쥐고 있는 감자의 껍질을 다 벗긴 일라이저는 찐감자를 반으로 잘라 반은 에버니저의 접시 위에 올렸다. 나머지 반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일라이저는 입 안 가득히 있는 음식물을 씹으며 또다른 찐감자를 가져와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일라이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감자껍질을 까던 것에 집중하고 있던 일라이저가 고개를 들었다. 먹어요. 에버니저가 자신의 포크에 폭챱을 찍어 일라이저의 앞에서 흔들었다.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에버니저와 폭찹과 번갈아 보더니 입을 벌렸다.
"이익, 놔줘요."
 에버니저가 자신의 포크를 사수하기 위해 힘을 줬지만 일라이저의 입은 쉽게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익, 이이익... 에버니저가 조금 분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포크를 빼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포크의 손잡이가 이리저리 움직이자 일라이저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에버니저 관록
감자에 미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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