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20160923 - 레비 클라우스 윈터하이드
2021-02-24 16:15

 대부분의 사람들은 별장 안에 있었다. 거칠게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인지 창문도 거진 닫혀있었고 식당 혹은 각자의 방에서 제각기 할 일 혹은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담력시험을 이유로 밀림을 함께 다녀온 알케나인은 옆 침대에 잠들어있었다. 그가 확실하게 잠들었다는 확신을 얻을 때 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다. 근처에 잡히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죽였다.

 

 방문 밖으로 들리는 말소리가 줄어들었을 무렵 레비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책을 읽기 위해 켜둔 램프의 초를 확인했다. 깊게 잠들어있는 알케나인을 힐끗 보고 천천히 마나를 전개해 등불 안의 남은 초를 유지시켰다. 마법이 제대로 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귀걸이를 툭 쳤다. 아주 잠깐 사용한 것이니 다른 사람들도 눈치 채지 못하겠지. 침대 옆 의자에 걸어둔 케이프를 어께에 걸치고 램프를 들었다.

 

 

 

 귀에 들려오는 말소리와 반대방향으로 길을 걸었다. 정해진 목적지는 없었다. 당분간 사람이 오지 않을 곳. 지금의 폭우가 아니었다면 별장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제법 있었을테니. 비에 감사함을 느꼈다.

 

 제법 시간을 들여 적당한 처마를 찾아낸 레비는 걸음을 멈췄다. 불이 켜진 곳과 제법 거리가 되었다. 어두운 밤과 폭우가 자신을 숨겨 주리라. 램프를 발아래 두고 풍경을 눈에 담았다.

 

 

 

 생에 처음으로 와본 아쉬클라르는 책에서 본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상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줘 실망스러웠다. 시종이 없다는 점을 빼면 괜찮은 별장이었다. 과연 아쉬클라르.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생각은 금방 사라졌지만.

 

 첫 번째 콘클라베. 그의 눈에 들어온 풍경. 난민들. 윈터하이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들. 책과 언어를 통해 듣는 것이 아닌 그의 오감으로 전해지는 비명. 절규. 표정. 냄새. 그들의 이야기. 자신과 다른 세계의 현실. 온몸을 짓누르는 무력감.

 

 아쉬클라르로 이동하기 직전 남들 몰래 상자에서 빼온 담배를 하나 꺼내 램프의 촛불에 가까이 가져갔다. 치이익, 알싸한 향기가 퍼짐과 동시에 끝이 타들어갔다. 반대편을 입에 물고 다시 수평선을 보았다. 입 안으로 회색빛 향이 들어왔다. 모인 숨을 뱉었다. 숨과 향은 굵은 빗줄기에 녹아들어 땅으로 떨어졌다.

 

 두 번째 콘클라베의 세 번째 그림. 중앙에 쓰러져 있던 네 명의 사람. 두 개의 문구. 시간이 지날수록 터져나간 사람이었던 것. 선택을 강요하던 버튼. 그리고 고쳐진 문구. 시간과 경험이 쌓일수록 가슴 속 한 켠 익숙지 않은 것들이 쌓여갔다. 첫 번째 콘클라베와 두 번째 콘클라베를 치루며 생긴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히 해야 했다. 다음 콘클라베에 지장이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리되지 않은 감정은 짜증을 가져왔다. 언젠가 경험했던 것이다.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근래의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과거로. 천천히 태엽을 감았다. 찰칵.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소리를 감았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철컥.

 

 숨이 멎었다. 찰나의 순간에 세계가 변했다. 자신은 이 순간을 알고 있었다. 어릴 적, 고치를 찢어 나왔던 그 순간.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것은 빗방울이었을까. 과거의 잔해였을까.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에 든 회색의 연기와 함께 비 냄새가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새로이 들어오는 공기가 어색했다. 몸의 움직임도 제법 달라진 듯 했다. 이 변화는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었고 이 기쁨 또한 자신의 것이었다. 태엽을 반대로 감았다. 츠르르르, 빗소리 사이로 태엽이 돌아가고 있었다.

 

끼익.

 

 

 

 

 

  끝이 보이는 담배를 땅으로 떨어트려 구두 굽으로 짓눌렀다. 제법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불쾌함. 제 의사와 관계없이 남의 의도에 철저히 놀아나는 것이 불쾌했다. 콘클라베는 불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제가 알기론 그걸 오만이라고 하는게 맞는 듯 합니다.

 

오만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또래 중에 그와 비슷한 실력은 가진 사람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조차 상대가 되지 않아 성을 떠났다. 가장 높은 곳에 별다른 노력 없이 도달했다. 그리고 마법사였다. 마법적 재능은 자신보다 동생이 뛰어났으나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축복이라며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그보다 위에 존재하는 사람은 없었다.

 

 

 약간의 시간과 돈을 들이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다. 애초에 그는 욕심이 없었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