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20200106 - 비 아산
2021-02-24 15:03

나의 산에게.

안녕? 지금 넌 내 옆에서 자고 있어. 이 편지는 몰래 쓰고 있고, 며칠 뒤에 다른 녀석에게 전달 될 예정이야. 편지를 보관해줄 녀석은 이걸 전달할 일이 없을 거라고 했지만 나는 널 믿어. 얼마의 시간이 걸리던 넌 이 편지를 읽고 있을거야. 그렇지?
 
 네가 내 생명줄을 늘려준 횟수가 몇 번 째 더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네. 내가 좌익찬이 된 뒤에는 내 업무까지 도와주고 있고. 너한테 도움 받지 않은 걸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네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 늘 감사하게 생각해.
 무지막지한 얼굴로 아임을 쓰는 네 모습은 언제 봐도 설레는 거 알아? 이제와서 고백 하는 거지만 날 치료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일부로 다친 적도 좀 있었어. 분명 너한테 욕도 먹고 혼도 나는데, 그게 그렇게 좋은거 있지.

 나는 앞에서 다른 사람들을 지키고, 너는 뒤에서 지키지. 둘 중 먼저 죽을 사람은 높은 확률로 내가 될 거라 생각해. 이 문장을 읽고있는 네 표정이 그려진다. 콱 구겨진 그거지? 인상 펴. 그게 다 주름으로 간다니까.
 넌 내가 다른 사람들을 지키는 걸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지? 나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야. 포지션 핑계를 대고 내가 나서지만 내가 아니면 네가 앞으로 튀어 나갈거잖아. 그게 싫어서였어. 조금 전에 고백했던 것처럼 겸사겸사, 내가 좋아하는 모습도 보고. 일석이조였지.

 내가 죽은 다음의 네 모습이 그려지지 않아. 나를 따라가겠다면서 죽으려고 들거잖아. 솔직히 찔리지? 부정 못하겠지? 그래서 약속해달라고 했어.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네 표정 정말 무서웠는데. 그래도 약속해줘서 고마워. 바보 같은 너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살아남겠지.

 이런 행동들이 네게 많은 상처를 준 것도 알아. 우리 참 많이 싸웠다. 안그래? 알면서도 나는 네게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 짊어지지 않는 삶을 살기를 바랬는데 결국 나도 네게 짐을 주는 것 같아. 참 나쁜 년이다. 욕해도 좋아.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너를 상상해보고 있어. 성격은 많이 죽였니? 담배는 줄였고? 내가 선물한 곰방대는 장식품이 되었을까? 지금은 뭘 하고 있어? 너는 지금 행복하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만, 넌 아주 천천히 와야해. 내가 아는 이야기보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더 많을 정도로. 우리 약속했잖아.
 
 내가 한 말이면 무엇이든 잘 들어주는, 나의 산에게.
 창아가.





아산은 무척이나 그리운 글씨체로 쓰여진 장문의 편지를 한참동안 읽었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읽었다. 여러 단어들의 나열이었지만 오래 전 세상에서 사라져 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여인이 눈 앞에 그려졌다.
임 창아.
입 밖으로 뱉는 순간 묻어두었던 그리움이 터질 것 같았다. 아산은 이름을 말하는 대신 옆에 두었던 낡은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가 사랑한 사람은 아름다우면서도 잔인한 여자였다. 20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와 한 마지막 약속은 여전히 건재했으며 그를 붙잡는 족쇄이자 살아갈 힘이 되었다.
소포 안에 같이 들어있던 몇 물건들을 정리해두고 정리하려는 순간 아산이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편지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 반갑지 않은 글씨체였다. 내용은 간결했다.


창아가 살아있을 때 내게 맡긴 편지야.
난 네가 일찍 따라 간다에 걸었는데. 내가 졌네.
하긴. 내가 너희들을 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개백수가 된 후 중앙 신전에 한 번 들려. 착한 내가 주먹 한 대 정도는 맞아줄게. 오랜만에 술도 같이 마시고.

내 심술 때문에 이제야 전달하네. 미안.



망할 새끼. 아산은 소리 내어 편지를 쓴 상대를 욕했다. 
 익위사를 그만 둔 뒤에도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죽을 수 없었다. 오래오래 살아남아야 했으며, 가능한 많은 사람을 살려야 했다. 그녀가 그것을 바랬기에 그는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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