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했다. 분명 자신은 제 운명대로 영웅에게 영웅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영웅에게 필요한 마법사와 신관. 그리고 프라가라흐까지.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춰져 있었다. 그럼에도 드는 이 이질감은 무엇일까. 단순히 불안해서, 신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서. 라고 치부해선 안된다는 느낌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메르는 페르디오를 보고 있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라는 이유였다. 그랬기에 폭주한 엘쿨루스를 1차적으로 봉인한 뒤에도, 키홀이 프라가라흐를 이용하여 모리안의 신성을 끊어낸 후에도. 심지어 마하의 배신으로 인해 또 한 번의 전투를 치르고난 뒤에도 메르는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선글라스 뒷편에 숨은 그의 눈을 읽어야만 한다고. 흔히들 말하는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메르는 볼 수 있었다. 키홀과 브린, 마렉. 두 사람의 인간과 한 때 인간이었던 신이 서로의 견해 차를 좁히지 못하는 사이에 작은 한숨을 쉬는 그를. 팔짱을 풀고 왼손을 허공에 내미는 순간을. 비어있는 허공에 프라가라흐가 나타나고, 그의 왼팔의 근육이 크게 움찔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미안. 내가 역겨운 왕궁 티테이블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어서 그만."
브린과 마렉, 그리고 키홀 사이에 꼳힌 프라가라흐를 보며 그는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 할 말 있는데. 해도 되는거지? 라고 말하며 자신이 던진 프라가라흐를 회수하기 위해 세 사람 사이에 섰다. 메르는 직감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느껴온 불안감의 정체를 알 수 있는 순간임을 알았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페르디오는 깊숙하게 박힌 프라가라흐를 꺼내고는 장난감 검을 휘두르는 것 마냥 가볍게 휘둘렀다.
"난 너무 궁금하단 말야… 지금 너희들이 떠들고 있는 것들을 직접적으로 해야 하는 건 난데, 내 의사는 어디에도 없단 말이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거 아냐?"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영웅인 당신이 아니면 누가…"
"그러니까. 내 의사는 어디로 갔냐고."
브린의 말을 자른 페르디오의 분위기는 뭔가 이상했다. 어조, 목소리 톤, 표정 그 모든 것들이 평소와 같았지만 같지 않았다. 메르는 자신의 입 안이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쥔 손을 의식적으로 풀어냈다.
"너희는 정말 변한게 없어. 예전에도, 지금도. 내게 모든 걸 떠넘긴 채 그저 구원해달라. 지켜달라. 따위의 말이나 하고 있지. 내 의사는 어디에도 없고. 내가 너희를 지켜주는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데. 내가 싫다고 하면 그만 아닌가?"
"당신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당신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브린. 나는 너를 높게 평가하고 있어. 다른 이들과 달리 너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네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런 네 평가를 스스로 깎아내려 하지마라."
"페르디오!! 너 정말…!"
"마렉.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내 이름이 페르디오인건 누구보다 잘 알아. 이상하네. 지금까지 자기들끼리 실컷 떠들고 있는걸 방해한게 그렇게 불쾌할 일인가? 신기하군. 여기서 발언권이 제일 큰 사람은 나일텐데."
너도 할 말 있나? 어깨를 으쓱인 페르디오가 키홀을 보며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키홀은 아무런 말 없이 페르디오를 보고만 있었다. 하긴. 지금의 나를 가장 잘 이해할 녀석이 너지. 웃음 섞인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어갔다.
"은퇴하고 모르반에서 얌전히 지내던 나를 끄집어내 이딴 일을 시키는게 불쾌했는데. 일이 점점 커지더라? 그래도 했어. 세상따위 멸망하던 말던, 신들끼리 싸우던 말던. 솔직히 알 바 아니었거든. 그래도 해달라는 거 다 해줬어. 이 세상이 멸망하면 시칼로스가 슬퍼할테니까.
이상하지 않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건 나 뿐이라는게. 왜? 나는 특별하지도,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닌데. 그냥 창 좀 휘두르는, 한 때 기사였던 용병 나부랭이가 세상을 구할 영웅이라는게. 이딴 코미디가 또 있을까. 부끄럽지 않아? 지금까지 내게 기생해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그제서야 메르는 그간 가져온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영웅이 아니다. 신들의 선택이 틀렸다. 운명 또한 틀렸다. 상황이, 환경이, 여러 변수들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으나 그 자리에 누구보다 어울리지 않는 이였다.
"하긴, 염치가 없으니 내게 매달려서 세상을 구해달라. 따위의 개소리를 해왔겠지. 신들도 마찬가지야. 이런 것들을 신이라고 추앙하고 찬양한 인간들이 불쌍할 뿐이던걸. 하는 행동들만 보면 그냥 힘만 센 인간들인데도. 말하고나니 참 불쌍한 세상이야. 저런."
그는 인간들을, 이 세상을 진심으로 연민했다. 브린과 마렉은 몰라도 메르는 알 수 있었다. 페르디오는 인간이었지만 이 곳에서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지 않은 이였다.
"신들의 유치찬란한 싸움에 낑기다 새우등이 터질 세상 따위, 차라리 멸망이나 하라지. 아니면 박제된 세상도 나쁘지 않겠네. 그래. 적어도 고통이나 슬픔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린 세상이니까. 나름대로 행복하지 않겠어?"
난 시칼로스 보러 갈래. 대화 끝나면 통보해. 언제나처럼 말이지.
마실 나간다는 듯한 투로 말을 마친 페르디오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 안이 씁쓸했다. 그럼에도 계속 그의 동정과 연민에 기대어야 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